KAIST 휴보 ‘DARPA 로보틱스 챌린지(DRC)' 우승!
‘이번 우승’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의미는 당연히 ‘희망’이겠죠. 그리고 또 있습니다.
KAIST 오준호 교수팀이 개발한 ‘휴보’가 6월 5일부터 이틀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포모나에서 열린‘DARPA 로보틱스 챌린지(DRC)'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
이번 우승 소식을 접하자마자 예전에 인터뷰 한 내용을 다시 찾아봤습니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휴보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알게 되면 다른 방향에서 다시 깜짝 놀라기 때문이죠.
아래는 2011년 인터뷰한 내용을 재구성 한 것입니다.
휴먼형 보행로봇? 그까이꺼!
2000년, 오준호 KAIST 교수는 뉴스를 통해 일본의 휴먼형 로봇 '아시모'를 처음으로 보게 됩니다.
오 교수는 '저것이 가능할까?' 황당해 하면서도 한편으론 '나도 못할 것 없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 교수는 (푼돈에 불과한) 연구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기저기 제안서를 냈지만 '턱도 없다'며 거부당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로봇 기반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휴면형 로봇 개발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는 동료 교수들 몇 명을 찾아가 각출하듯 6000만 원을 마련했습니다. 이 돈은 당시 'BK21 사업'을 통해 교수들에게 1000만 원 씩 지급된 일종의 보조금인데, 우여곡절 끝에 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2년, 오 교수는 연구를 시작한지 단 6개월 만에 2족보행 로봇 'KHR-1'을 완성했습니다.
다른 나라 개발자가 알면 정말 까무러칠일이었지요.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오 교수는 KHR-1을 학교측에 보여주면서 1년 연구비 1억 5000만 원을 신청했습니다.
오 교수의 결과물에 깜짝 놀란 학교측은 오히려 3년 과제로 선정해 제대로 해보자며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오 교수는 "일본이 이미 완성한 것을 3년이나 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면서 제안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연구에 착수한 오 교수.
이번에도 시작 6개월 만인 2003년 8월, 휴보의 전신인 'KHR-2'를 완성했고요.
주변은 또 다시 깜짝 놀랐지요. 휴보의 탄생인 것입니다.
오 교수 표현으로는 이를 본 사람들이 '놀래서 자빠지더라'고 합니다.
휴보를 모르던 정부, 우리나라에 왜 왔냐는 일본
당시 정부는 우리나라 7대 성장동력사업 중 하나로 '로봇'을 채택했습니다.
그런데 오 교수는 이런 사실을 몰랐고요. 정부 역시 오 교수의 로봇 개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우리나라 기술로는 로봇의 독자 개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일본이나 유럽 등과 기술 제휴를 추진하고 있던 상황입니다.
그래서 정보통신부 관계자들이 일본으로 날아가 로봇 개발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그런데 일본 측 반응, "당신네 나라에 이미 KHR-2(휴보)가 있는데 왜 왔냐"고 하더랍니다.
결국 정부 관계자들은 일본에서 오 교수의 소식을 듣고 다시 KAIST로 찾아온 웃픈 사실.
그리고 그 무렵 KAIST에서 부총리가 참석하는 만찬 행사가 있었는데요.
그 때 총장이 "우리 학교 오 교수가 로봇을 만들었는데 그럴듯 하다"고 말했더니 부총리가 '볼 수 있냐"고 물었고, 바로 랩실을 찾아왔더랍니다.
오 교수는 랩실에서 변변찮은 저녁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부총리 일행 손님을 맞게 됐지요.
부총리는 KHR-2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과기부는 이런거 지원 안 하고 뭐하고 있었냐 는 등...' 이하 줄줄이.... 자세한 내용은 상상에 맞겨요.
아무튼 그래서 한바탕 난리가 났겠지요.
이런 우여곡절 끝에 2004년부터 오 교수에 대한 정부 지원이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오 교수는 이번에도 1년도 안 되어 '휴보'를 완성했습니다.
초 단기간에 휴보를 만든 오 교수는 하루 아침에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됐습니다.
심지어 외국의 정보기관에서도 그를 찾아왔다고.
특히 '아시모'를 개발한 일본은 한마디로 '까무러치게 놀랐습니다.'
자신들이 수백 억의 자금과 수십 명의 전문가를 투입해 10년 넘게 개발한 것을 한국의 한 과학자가 '푼돈'으로 단기간에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로봇을? 제자들의 반란
당시 재미있던 일화가 있습니다.
바로 오 교수 밑에 있던 대학원생들의 반란입니다.
그들은 당초 자신이 배우고자 했던 공부는 못하고 '담당 교수의 취미만 뒤치닥거리 한다'는 불만으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당시 현실로는 '턱도 없는' 로봇이라니...
이런거 왜 만드냐고 투덜대는 제자들은 급기야 오 교수를 찾아가 집단 항의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지금 그 학생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 학생들 휴보 만들다가 출세해서 다들 교수됐어."
물 만난 고기
자신의 대학시절을 그는 한마디로 '물 만난 고기'라고 표현합니다.
당시 그의 최대 관심 사항은 자동제어나 연결 시스템 등 이었고, 이는 이미 중·고교 시절 독학으로 전자공학도 터득했던 터였습니다.
오 교수는 학교에서 금세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대학교 3학부터는 대학원 선배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필요한 실험장치가 있으면 직접 청계천에 가서 부품을 사와 만들고, 실험실 장비가 고장나면 혼자 수리도 했습니다.
당시 실험실에는 과거 한일협정 당시 대일 청구권으로 들어온 일제 과학기제자가 쌓여있었다고 합니다.
이중 고장나서 방치된 것들이 많았는데, 이것을 수 없이 뜯어보고 기능을 살려냈습니다.
연대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바이오메커니즘을 공부했습니다.
대학원을 마치고 2년동안 원자력연구소에 근무하다가 시스템자동제어(동역학자동제어)를 배우러 미국 버클리대로 유학길에 오릅니다.
버클리대에서도 그는 무엇이든 잘 만들어내는 재주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학문에 관심없던 KAIST 교수
3년 반만에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KAIST 교수가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논문을 쓰거나 연구 프로젝트를 따내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 때 그 때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것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수로 부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오 교수는 이미 탄소섬유로 제작한 초경량 로봇을 만들어봤고, 1990년 초반에는 무인헬기의 호버링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고, 1993년에는 요즘 한창 미국에서 실용 연구가 4족보행 로봇도 만들었지만 당시 발표조차 안했다고 합니다.
또 1994년에는 러시아와 공동으로 초정밀 자이로스코프와 리얼타임컨트롤장치 등을 개발했습니다.
이렇게 오 교수는 기계설계, 마이크로프로세서, 폼웨어, 실시간제어기술, 자동제어, 안정화기술, 센서기술, 계측기술 등 연구인지 취미인지 모르게 로봇에 관한 기반 연구를 하나하나 완성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오랜 어릴때 기억은 호기심
오 교수의 취미인 '연구'는 그가 가장 더듬어 기억할 수 있는 어린시절부터 시작됩니다.
오 교수는 "3~4살 때 그런 기계에 매료됐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합니다.
'꼬마 오 박사'는 할머니의 재봉틀이 움직이는 것부터 째깍째깍 움직이는 시계, 각종 공구 등을 보는 것 자체가 즐거웠습니다.
어린이에게 공포의 대상인 병원조차 '꼬마 오 박사'에게는 신기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병원에 간 꼬마 오 박사는 각종 진단기기와 장비들을 보는 것이 즐거워 무서운 것도 잊어버렸다고.
초등학교 3학년이 만든 다단계 로켓
이런 오 교수의 학창시절은 줄곧 탐구와 만들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종이로 몸체를 만들고, 노즐부는 분필에 구멍을 뚫은 3단 로켓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추진체는 문방구에서 파는 빨간 종이화약을 사용했고, 나중엔 화려한 폭발효과를 내기위해 알루미늄 가루까지 넣은 흑색화약을 직접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그의 연습장에는 작동 메커니즘을 담은 로봇이나 비행기 스케치로 가득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간 오 박사는 곧 전자공학에 빠져들었습니다.
지금처럼 조립 키트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회로부품을 구하려고 청계천 고물상으로 출퇴근을 하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쇠를 깍아 만든 증기기관차
어느날은 증기기관차를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집 근처의 공작기계 업체에 가서 직접 설계한 실린더를 쇠를 깍아 만들고, 추진력은 알코올램프로 끓인 증기를 이용했습니다.
또 발사목을 다듬어 비행기를 만들었고, 큰 연을 만들어 어디까지 날아가나 끝없이 날려보기도 했습니다.
렌즈를 구입해 직접 천체망원경을 만들어 목성 관찰에도 성공했습니다.
장판을 걷어내야했던 그의 공부방
그런 그의 공부방은 사실상 공장의 작업실과 같았다고 합니다.
나중엔 아예 장판을 걷어내 시멘트 바닥이었고, 책상도 치워버렸습니다.
대신 그 곳에는 온갖 연장이 가득한 선반과 작업대로 변했습니다.
학창시절 오 교수는 장래 희망은 당연히 이공계를 진학해 교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회상합니다.
그러나 학창시절 오 박사의 객관적인 성적은 그리 희망적이지 못했습니다.
아니 교수는 고사하고 웬만한 대학진학 조차 힘든 수준이었습니다.
수학과 과학만 특출나게 잘했지만, 국어, 사회, 영어 등 나머지 과목은 대부분 과락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고교 2학년때가지 그의 성적은 한 학급 60명 중 50등 대를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전교 꼴찌가 6개월만에 전국 20등
고교 2학년 시절.
그나마 좋아했던 수학마저 '시시하다'는 생각에 손을 놓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극한'을 접하면서 그는 득도하듯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때가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때입니다.
마치 학문의 원리를 깨친것 마냥 그는 미친듯 파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방치하다시피 했던 국어, 사회 등 다른 과목에도 빠져들며 자신의 호기심을 채웠습니다.
그렇게 6개월 동안 고교 3년 과정의 전 과목을 탐독했습니다.
그의 성적은 전교 꼴찌 수준에서 순식간에 전교 20위 권으로 급상승했습니다.
고 3이 되기 전 이미 고교 전 과정을 독학으로 끝낸 그는 다시 학억에 흥미를 잃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고3 시절 플룻 등 악기를 배우며 소일했습니다.
오 교수는 물리학과로 진학해 순수 과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선생님들이 의대나 공대를 추천했습니다.
그래서 진학한 곳이 연세대 기계공학과입니다.
서울대는 왜 안 갔냐고 물었더니, 독일어 때문이랍니다.
독일어에는 흥미가 없었다고.
아엠 유어 파더! 아시모는 아버지가 없지만, 난 휴보 아버지
휴보의 아버지 오 교수는 현재(2011년 당시) 보다 개선된 성능의 휴보를 만들고 있습니다.
또 기술력을 인정받은 휴보는 미국 등 해외에서 연구용으로 발주 받아 수출도 되고 있습니다.
오 교수의 바램은 휴보가 전 세계 로봇 연구자들의 표준 플랫폼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현재 오 교수는 휴보보다 안정화된 KHR-2+ 개발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취미인 '또 다른 연구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오준호 교수와의 1문 1답 -천재 아닌가? -초등학교 시절은 어땠나? -초등학교 때 기억에 남는 발명품은? -그렇다면 중학교 시절은? -당시 장래 희망은? -그러면 어떻게 대학을 갔나? -6개월만에 고등학교 전과정 공부를 마친 것인데? -그런데 어떻게 공부를 잘하게 됐나? 수험생이나 학부모가 관심있을 내용이다. -대학생활은 어땠나? -대학 졸업 후는? -KAIST 교수가 되어서는? -지금은 로봇 전문가인데? -로봇 공학에 대해 설명한다면? -휴보는 어떻게 만들게 됐나? -당시 제자들까지 반대가 심했다고? -로봇 개발 계획은 어떻게 발전했나? -정부 과제로 선정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정부 지원은? -KHR 시리즈를 간단히 설명한다면? -휴보의 의미는? -또 무엇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인가? 바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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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보2 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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