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삼옥 박사(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책임연구원)는 자타가 공인하는 비행기광입니다.
오죽했으면 그 스스로도 ‘전생에 날짐승이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고 합니다.
구 박사와 비행기와의 인연은 보통 사람들이 기억하기도 어려운 5살 때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경남 고성에 살던 그는 인근의 사천비행장에서 날아 올라 편대비행하던 전투기들을 넋 놓고 바라보곤 했습니다.
5살 꼬마는 ‘저 비행기들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어른들에게 물어, 혼자서 사천비행장까지 걸어가려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비행기를 동경하던 꼬마는 고무동력기와 과학 잡지 ‘학생과학’을 좋아하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중학생이 된 구 박사는 본격적인 비행기 만들기에 도전했습니다.
어느 날은 학생과학에 난 모형비행기 매장 광고를 보고는 모은돈 ‘180원’을 쥐고 무작정 부산까지 갔습니다.
완성 키트를 사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던 180원으로 구 박사는 중고 엔진과 기체를 만들 발사목, 베니어합판 등을 사왔습니다.
나중엔 재료가 모자라 집 뒷산의 오동나무까지 베어가며 비행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비행기광, 조종사 대신 과학자의 길로
학창시절 구 박사의 꿈은 당연히 공군사관학교에 진학해 전투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교 때 시력이 공사 입학 기준에 약간 미달했던 탓에 공군 조종사의 꿈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대신 그가 생각한 곳은 당시 국립대학으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한국항공대학교입니다.
1977년 그는 1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항공기계공학과에 합격했습니다.
항공대에 간 구 박사는 캠퍼스에 활주로가 있고, 게다가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것을 직접 보면서 ‘천국이 따로 없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비행기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던 구 박사는 졸업 후 바로 한국과학원(현 KAIST) 항공과로 진학했습니다.
학비가 무료인데다 24시간 공부할 수 있는 캠퍼스 시스템이 무엇보다도 그의 맘에 들었습니다.
석사를 마친 그는 당시 경남 창원에 있는 한국기계연구소 항공기계실에 입사하면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직장인이 된 그는 수입이 생기자 그동안 돈이 없어 만들지 못했던 모형비행기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연구원 생활을 하던 그는 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전신인 항공우주연구소 창설 맴버로 조직 구성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연구소 추천으로 KAIST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그는 당시 한·중 협력 사업인 ‘중급항공기’ 개발 계획에 참여해 설계를 담당했습니다.
당시 이 사업은 양국의 이견으로 1999년 중단됬고, 대신 우리나라는 이를 무인기로 축소 개발해 미완된 기술이라도 습득하게 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고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무인기 개발 그룹이 생겼고, 이는 무인기 ‘두루미’ 사업에 이어 현재 진행 중인 ‘스마트무인기’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비행기를 만들려면 직접 날아봐야 한다
이 즈음 구 박사는 비행기를 더 잘 만들려면 실제 비행 계획을 세우고 직접 비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기회는 곧 찾아왔습니다.
2005년부터 1년간 미국 조지아텍 연구연가를 갔던 시절, 구 박사는 자비를 들여 6개월 간 조종사 훈련을 받고 정식 면허증을 획득했습니다.
평생 비행을 동경하던 그였지만, 첫 비행의 소감은 뜻밖에도 ‘이 정도 갖고는 갈길이 멀구나’였습니다.
구 박사는 비행기를 만들려면 실제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환경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비행기를 직접 타보니 교과서로만 보던 비행과는 엄청난 차이를 느꼈습니다.
이 같은 그의 경험은 다른 항공 전문가들에게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고, 이후 몇 몇 연구원과 교수들이 구 박사의 뒤를 이어 비행기 조종사 면허를 취득하기도 했습니다.
구 박사는 항우연 스마트무인기개발사업단 무인체계팀장을 맡아 휴일도 없이 연구개발에 몰두했습니다.
무인기 전문가이자 유인 항공기 조종사이기도 한 그의 꿈은 현재 자동차 운전 기술 수준으로 조종할 수 있는 비행기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즉, 자동차처럼 장소에 제약없이 이착륙하고 보관할 수 있고, 안전하게 하늘을 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현되려면 보다 많은 부분이 무인화 돼 현재 요구되는 복잡한 비행기술을 컴퓨터가 보완해줘야 한다고 합니다.
구 박사는 무인기의 자동화 기술과 기존 유인기의 비행 기술이 접목되면 일반인도 타고 다니는 비행기를 실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불모지에서 맨몸으로 시작한 기술들을 다듬어 쓸모있는 보석으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 구 박사의 계획입니다.
<구삼옥 박사 1문 1답>
-어려서부터 비행기를 좋아했다는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전생에 날짐승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본능적으로 좋더라고, 비행기 좋아하는 사람 어렸을 때 반짝 좋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끝까지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수이지만 굉장히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진학 전에 편대비행 하는 비행기를 넋을 잃고 봤던 기억이 난다. 학교 다니는 형들 누나들 책에 있는 비행기를 보면서 나중에 크면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어려서 꿈은?
"비행기를 타보고 싶었고, 중학교 때까지는 공군사관학교 진학이 목표였다. 그 때 공사 입학 기준은 상당히 높았다. 고등학교 입학까지는 시력이 좋았는데, 고 3때 시력이 1.2여서 결격됐다."
-언제 비행기를 처음 만들었나?
"고무동력기 만들던 친구들이랑 엔진 달린 비행기를 만들자고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용돈을 모아서 마산에서 부산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학생과학 잡지에 난 광고를 보고...아직도 기억난나. 학생과학 1971년 5월 호. 당시 채연석 박사(전 항우연 원장)가 경희대 학생으로써 로켓개발의 역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중고 엔진이랑 비행기 키트까지 사면 비싸기 때문에 발사목과 베니합판 등을 사고 모자란 자제는 뒷산의 오동나무까지 베어서 유선조정 비행기 만들었다."
-고교 시절은?
"고등학교에 가면서 입시를 준비하느라 비행기를 거의 못 만졌다. 공군사관학교를 못가게 되니 항공 관련 학과는 서울대, 인하대, 항공대 세 곳 뿐이었다. 당시 항공대는 항공대는 국립으로 서울대 치대보다도 점수가 높았다. 당시 예비고사 제도에 따라 지역을 선택해야 했고, 항공대에 특차 지원했다. 1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항공대는 어땠나?
"77학번 항공기계공학과 입학. 학비가 국립 사범대 수준이었는데, 등록금이 7만 원이었다. 학교에 활주로가 있고,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것에 놀랐다. 비행기를 보면서 학교를 다니니 천국이 따로 없더라. 학교가 작고 학생수도 적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됐다. 입학해서 모형비행기 동아리 재창설하고 회원을 모집했 활동했다. 대학 시절 무선조정 비행기를 만들었었는데, 다 만들때 즈음 항공대가 사립으로 전환됐고, 육군항공대가 터줏대감 행새를 하면서 학생들의 비행기를 못날리게 했다."
-KAIST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졸업할 즈음 한국과학원(현 KAIST) 항공과가 생겼다. 1981년이다. 좋더라. 학비가 무료고, 캠퍼스를 24시간 가동했기 때문에 웬종일 공부하는 천국이었다."
-졸업 후 진로는?
"석사학위를 받고 새로 생긴 한국기계연구소 항공기계실에 들어가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동안은 돈이 없어서 비행기를 못했는데, 돈을 벌어 비로소 비행기를 할 수 있어 기뻤다. 1983년에 산 조정기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항공기 및 부품 품질보증 체제와 다목적 무인 비행선, 항공기용 개스터빈 엔진 등을 연구했다."
-항우연 창설맴버가 됐다고?
"당시 항공기계실장인 최동완 박사와 항공우주연구소 창설 작업에 참여했고, 1989년 10월 현판식을 가졌다. 당시는 기계연구소 대전 부설이었다. 1989년부터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연구소 추천으로 KAIST에서 공력음향학을 공부했다."
-무인기는 언제부터?
"1995년 박사를 마치고 중급항공기 개발에 참여하면서 항공기를 설계했다. 그러다가 중형항공기 사업으로 격상되면서 비행기 개념 설계를 맡았다. 그러나 우리는 터브프롭, 중국은 제트여객기 개발 주장하면서 틀어졌다. 1999년 사업이 중단되면서 본격적으로 무인기 관련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개발한 기체의 축소모델을 무인기로 만들어 기술을 습득하자는 것이었다."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전자분야를 처음 개발하다보니 비행을 실현하기에는 무리였다. 일단 RC로 날리는 비행은 안정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경험으로 1999년에 무인기 과제를 시작하면서 '두루미' 그룹이 생겼다. 난 그룹장이 됐다. 당시 목표는
24시간 체공하며 자동비행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엔진 성능은 24시간 이상이지만 전자장비가 2시간만 비행하면 오류가 생겼다. GPS 수신 이상, 관성센서 오류 등이 생기더라. 나중에 기상관측용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기도 했다. 사업은 2004년 종료됐다.
-무인기의 본격적인 개발은?
"두루미로 무인기 체계가 완성되는 한편 21세기 프론티어 사업으로 2002년부터 스마트무인기 사업이 시작됐다.
스마트무인기 사업 초기에는 전자 통신 관제 등의 중과제로 나눠져 있었는데, 그 중 체계종합 그룹 책임자가 됐다. 중간에 연구소 기본 연구 중 실용화 대상이 있으면 신청하라는 얘기가 있어 2007~2009년 '두루미3' 과제를 했다. 해당 기술은 영풍전자에 이전됐다. 또 소형무인기 지상관제시스템과 비행제어 컴퓨터 기술도 개발돼 이전했다."
-스마트무인기 개발 과정은?
"축소기를 통해 한 번도 안해 본 형태의 비행체를 시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제작을 하다보니 축소기 자체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많은 아이디어가 나와 2006년 가을부터 시험비행에 들어갔다. 우선 RC부터 시작했다. 이어 비행제어 컴퓨터를 장착하고 무인기로 만드는 작업을 2008년까지 진행했다. 2008년 8월 풀 컨버젼 천이비행 자동과정을 했고, 2008년 9월 데모 비행을 했다."
-비행기 조정 면허를 받았다는데?
"당시 고참 연구원부터 연구 연가를 보내주던 시절이다. 2005~2006년 1년 동안 조지아텍으로 연구연가를 다녀왔다. 이 시절 자비로 비행기 조종 훈련을 받았고, 미국 조종사 면허을 땄다. 비행기 시험을 하려면 비행기가 실제 날아다니는 환경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많이 날려만 봤지, 실제 비행 계획 제출하고 관제사와 통신하는 등 활동을 해보니 무인항공기도 유인항공기를 알아야겠다는 생각 절실했다.
-늘 비행을 꿈꿨는데, 느낌은 어땠나?
"비행기를 직접 타보니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이후 비행시험을 하는데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됐다. 비행에는 룰이 있어, 무인기라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없다. 나중에 충남대 석진형 교수도 자극을 받아 결국 미국가서 비행 면허증을 받더라. 또 항우연 성기정 박사도 미국서 조종교육을 받고 왔다. 나한테 바람잡혀서 여러명 다녀왔다. 실제 비행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외국의 연구원이나 항공사는 직원이 비행면허가 없으면 회사에서 돈까지 주며 면허를 따게 한다."
-단독 비행은 언제?
단독비행은 1996년 남원에서 초경량비행기를 몰았던 것이다. 드디어 날았다는 흥분과 만족과, 실망이 교차했다. 야~ 이정도 갖고는 갈길이 멀구나 생각했다."
-스마트무인기에 대해 설명하면?
"차근차근 한발한발 가야 한다. 비행기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기술적인 성과를 더욱 많이 내서 틸트로터 무인 항공기의 실용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당면과제다. 수직이착륙을 할 수 있으면서 공중에 오래 떠있고 빠르게 날 수 있는 비행기 개념은 이것 밖에 없다. 스마트무인기를 제대로 개발하면 시장은 새로 생길 것이다. 그것이 되도록 물 주고 거름 주고 하며 가꿔야 한다. 맨땅에 박치기 하며 여기까지 왔다. 조금만 더해서 쓸모있는 보석으로 만들고 싶다."
-앞으로의 계획은?
"지금 유인 항공기는 보통 사람들이 탈 것으로 하기에는 너무 불편하고 어렵다. 그래서 무인기 기술의 자동화, 자율화에 유인기의 비행 기술이 접목되면 보통 사람도 타고 다닐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수 있다. 그렇게 해서 나부터 타고 다니겠다. 조만간 비행기 한 대 장만해서 내 손으로 타고 다니면서 자동화해야겠다. 자동차 운전 배우는 정도면 타고 다닐 수 있는 비행기. 예전엔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기술이 발전해서 가능한 것이다. 미국에 가면 아이패드 비행용 어플이 그렇게 많이 나와 있다. 아이티 기술이 접목되면 아무나 타고 다니는 비행기 나올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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