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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 때인 1448년 개발된 세계 최초 2단형 로켓이자 세계 최대의 고체연료 추진 로켓무기인 '대신기전(大神機箭)'의 연구개발 책임자가 당시 39세의 군기감정(軍器監正) 박강(朴薑 : 1406~1460)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조선시대 군기감은 현재 국방과학연구소(ADD)와 같은 곳입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채연석 박사(전 항우연 원장)가 조선왕조실록과 병기도설 등 사료 연구를 통해 밝혀낸 사실을 보면 박강이 세종 27년(1445년) 3월 39세의 나이에 군기감정을 맡아 고려 최무선 때부터 사용되던 로켓무기 주화의 성능작업을 수행했습니다.

박강은 폭약통인 소발화를 장착한 사거리 200m의 '중주화'와, 보다 대형폭탄을 장착한 사러기 500m 이상의 '대주화' 등을 개발했습니다.

박강이 개발한 주화 무기체계는 세종 29년 가을부터 여진족을 격퇴시키기 위해 평안도와 함길도의 4군 6진에 총 2만 4930발이 배치됐습니다.

이중 9000개는 박강이 평안도 현지에서 직접 제조했다고 합니다.

당시 박강이 개발한 '중주화'와 '대주화'는 세종 30년(1448년) 6월, 총통등록(銃筒謄錄)이 발간되면서 이름을 '중신기전'과 '대신기전', '산화신기전' 등으로  바뀌고, 그 규격은 1474년 편찬된 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에 기록됐습니다.

채 박사는 우리의 전통 로켓인 신기전을 지난 40년간 지속적으로 연구해 원형 복원에 성공했고, 영화 '신기전'의 자문도 담당했습니다.

채 박사는 신기전 관련 설계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록할 계획입니다.


<연구개요>

박강은 조선 초에 좌의정을 지낸 박은의 둘째 아들로 1406년 출생하였다.
시호는 세양(世襄)이다.
실록에는 성품이 정교하고 기술과 재능이 많았으며, 젊었을 때 호협하고 얼굴 가꾸기를 잘하여 명기(名技)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하였다.
군기감정 이후 1449년 이조참판, 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웠다.

○ 박강은 세종 29년(1447년) 12월 평안도에 파견 나가 주화 9000개를 제조하는데, 로켓화기는 구조와 제작방법이 복잡해서 로켓 전문기술자이어야 제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 29년 11월 22일, 주화는 말에서 달리며 혼자서 발사할 수 있고, 비행할 때 나오는 화염과 소리 때문에 적이 스스로 항복하고 겁에 질리게 한다는 장점을 열거하면서 평안도와 함길도에서 여진족을 퇴치하는데 주화가 효과적일 것이라 하여 3차례에 걸쳐서 대량인 1만 1390개의 주화를 보내면서, 더 필요한 양을 요청하라고 지시한다.
세종 29년 12월 2일 평안도와 함길도에서 요청한 주화의 수효가 너무 많았는지, 박강을 평안도에 임시로 파견 보내  한양에서 보내온 재료를 이용하여 중주화 2000개, 소주화 7000개를 규격과 제조방식대로 제조한다.
그리고 함길도에는 박강과 함께 군기감에서 같이 일했던 원익수(元益壽)를 감련관으로 보내 중주화 1040개, 소주화 3500개를 현지에서 제작한다.
군기감에서 파직당한 6개월 후에 군기감 소속이 아니면서도 박강이 현지에서 중주화와 소주화를 제조하는데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군기감에서 파직되기 전까지 2년 3개월간 근무할 때 '주화'의 개량 및 연구 개발을 주도하여서 본인이 직접 주화를 제작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자가 신기전을 복원하여 발사시험을 해보니 제작방법과 구조가 복잡해서 본인이 직접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잘 제작할 수도, 잘 제작하였는지를 감독할 수도 없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 신기전의 전신인 주화가 본격적으로 사용 되는 세종 29년(1447년) 11월 직전에 대주화의 연구 개발기간으로 추정할 수 있는 2년 3개월간(세종 27년 3월부터 29년 6월까지) 세종시대의 화약무기를 연구개발 및 제작을 담당해온 군기감의 최고 책임자인 군기감정(軍器監正)이었다.
 
고려 때 최무선에 의해 개발되어 몇 개씩 사용되는 기록이 보이던 '주화'가 세종 29년 가을에 이르러 갑자기 1만 1390개(소주화 6500개, 중주화 4800개, 대주화 90개)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북방으로 보낸 기록이 나타나므로 이 이전에 충분한 개발기간이 필요하다.
실제로 대신기전을 복원하여 발사시험 해본 결과 많은 시험이 필요하였고 대신기전의 개발에는 적어도 1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 재주와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세계 최초의 2단 로켓이며 세계 최대의 종이약통 로켓화기인 대주화는 무게가 4.5~5kg의 무게이다.
소발화가 달린 중주화의 무게는 200g, 소주화의 무게는 100g 정도이다.
따라서 대주화는 중주화보다도 23~25배 더 무거운 대형 로켓화기이며 이렇게 큰 로켓의 연구개발에는 과학기술분야에 창의력과 재주를 갖춘 뛰어난 과학기술자가 필요하다.
세종은 27년(1445년) 3월 30일, 그 동안의 화약무기 개발의 성과를 논의하면서 당시에 군기감에 근무하던 화약무기기술자로는 더 이상 획기적인 화약무기를 개발하기 힘드니 창의력과 재주가 뛰어난 새로운 인물로 박강을 추천 받아 군기감 책임자로 임명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박강은 성품이 정교(精巧)하고 기능(技能)이 많아서 처음에 벼슬을 하면서부터 군기감을 맡아 잘 수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박강은 당시 조선에는 없었던 새로운 로켓화기인 중주화와 대형 로켓화기인 대주화를 개발할 수 있는 재능을 갖춘 과학기술자로 추정된다.

○ 박강은 군기감에 판사로 있다가 파직 당했는데도 그 이후 계속 승진하는 것은 군기감에 근무할 때 새로운 주화를 개발 한 공로 때문이다.
 
박강은 군기감에 책임자로 있을 때 기술자가 죄를 짓고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이를 판결하는 과정에서 불명예스럽게도 세종 29년 6월 2일 파직 당했다.
그러나 세종 31년 2월에는 공조참의로, 문종 원년(1450년) 8월에 황해도 도절제사로 그리고 5개월 뒤에는 황해도 도관찰사겸 병마도절제사로 계속해서 승진하는 점도 4군 6진에서 성공적으로 여진족을 무찌르는데 사용된 주요 신무기인 주화 종류를 군기감에서 성공적으로 개발한 공로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박강과 함께 군기감에서 같이 파직 당했던 원익수도 문종 1년 5월경 군기감정으로 다시 복귀한다.

위와 같은 점을 종합해 볼 때 박강을 주화를 개량하여 만든 중주화(후에 중신기전으로 이름이 바뀜) 및 대주화(후에 대신기전, 산화신기전으로 이름이 바뀜)의 개발 책임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채연석 박사 TEDxDaejeon 강연 보기 http://youtu.be/jaU2DmSo2aA>


 

<채연석 박사>

- 1975년 11월 역사학회에서 '주화와 신기전 연구'-한국 초기(1377~1600)로케트에 대하여 -를 발표

- 1978년 11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행주산성 유물기념관에 화차와 신기 전 복원 전시'

- 198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34회 국제우주대회(IAF)에서 'A Study of Early Korean Rockets(1377~1600)'발표

- 1993년 4월 대전 엑스포에서 화차와 중, 소신기전 복원 첫 발사시험,

- 2003~2008, 영화 '신기전' 제작자문

- 2008년 9월 대신기전 복원 발사시험, 영화 '신기전' 개봉(46회 대종상 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수상)

- 2009년 10월 대전에서 열린 국제우주대회(IAC)에서 'The History of Korean Rockets(1377~2009) - From Juwha to KSLV-1' 발표.(산화신기전이 세계의 최초 2단 로켓'임 발표)

- 2010년 11월 '중신기전의 소발화 폭발', '산화신기전 발사시험(주화 2단 분리 성공)





산화신기전에서 2단 로켓격인 지화가 분리되는 순간(2009년 11월 발사시험에서)


이륙하는 대신기전의 발사모습. 길이 5.5m 무게 3kg의 초대형 로켓화기인 대신기전과 산화신기전(2010년 5월 21일 고흥 비행센터 활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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